
감각에서 감정으로
우리는 다양한 감각을 통해 주변 환경을 인지한다. 감각은 우리가 의식하기도 전에 뇌에 신호를 보내 몸과 마음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갑작스러운 소리를 들으면 소리의 원인과 상관없이 심장이 미칠 듯이 뛰고 호흡이 빨라지며 동시에 몸이 움츠러든다. 무의식적으로 몸과 마음이 외부 자극에 즉각 반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체 내부의 변화를 인식하는 순간의 경험이 바로 '느낌(feeling)'이다. 이는 아직 '공포'나 '놀라움' 같은 구체적인 감정은 아니다. 마치 휴대폰 배경 화면의 작은 창에 띄워진 상태 메시지 같은 것이다.
느낌은 단순한 신호에서 출발하지만, 뇌섬엽(Insular lobe)과 복내측 전전두피질(vmPFC)과 같은 뇌 영역에서 과거 경험과 통합되고 해석되면서 더욱 복잡하고 구체적인 감정으로 발전한다. 앞서 예로 들었던 큰 소리를 들은 경우, 뇌는 현재의 느낌을 ‘범주화’한다. 위험한 상황에서 들었던 소리와 유사하다면 공포라는 개념으로 분류하고, 축제에서 들었던 폭죽 소리와 유사하다면 놀라움이나 기쁨으로 분류한다. 우리가 그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공포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기쁨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감정은 사소한 느낌에서 출발하지만, 느낌에 문화적으로 학습한 개념을 바탕으로 의미와 맥락을 더하면서 형성된다.
감정은 생각보다 빠르게 생성되며, 때로는 이성보다 앞서 판단과 행동을 이끌어낸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 감정은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한다. 생존을 위해 감정은 빠르고 직관적인 결정을 가능하게 만들며, 집중하거나 도망치거나 싸울지를 선택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감정은 단지 감상적인 반응이 아니라, 생존 전략의 중요한 일부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감각 요소를 담고 있는 공간은 우리의 감정에 어떻게 작용하고 삶에 얼마나 깊이 관여할까.
확장된 신체
우리는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눈으로만 공간을 인식하지 않는다. 피부는 온도와 감촉을 느끼고 청각은 소리의 크기와 울림을 분석한다. 후각은 특정 냄새를 통해 공간의 정서를 읽어낸다. 감각은 신체 전반에서 동시에 작용하며, 뇌는 이들을 종합해 공간의 상태를 판단한다. 그 결과, 심장 박동과 호흡이 변화하고 근육이 긴장하거나 이완 하는 생리적 변화가 발생한다. 이러한 느낌은 앞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감정의 형성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공간이 주는 감각 자극은 뇌의 해석을 거쳐 느낌으로 전환되고, 그 느낌은 곧 감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천장이 높고 채광이 좋은 공간은 ‘자율 신경계’를 안정 시키며 개방감과 심리적 여유를 유도한다. 반대로 천장이 낮고 어둡거나 소음이 많은 공간은 경계 반응을 유도해 불안과 긴장을 증가 시킨다. 즉, 공간은 감정을 유도하고 조절하는 환경적 요인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상하부는 체내 ‘항상성’을 유지하는 핵심 기능을 한다. ‘항상성’이란 체온, 혈압, 혈당, 수분과 같은 내부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생물학적 조절 메커니즘이다. 시상하부는 감정과 관련된 호르몬(예: 코르티솔, 옥시토신 등)의 분비를 조절하고, 자율신경계를 통해 심장 박동, 혈류, 근육 긴장, 호흡 등의 생리 반응을 실시간으로 조율한다.
이처럼 공간에서의 경험은 단순한 감각 정보의 인식이 아니라, 다양한 감각에 따른 생리 반응, 그리고 감정의 흐름이 통합된 총체적 경험이 된다. 우리는 공간을 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공간을 '느끼고', '해석하고', '기억하는'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간은 더 이상 수동적인 배경이 아니다. 우리의 신체와 감정, 기억과 연결되는 '확장된 신체'로 작용한다.
감각으로 기억되는 공간
우리가 어떤 공간을 기억할 때, 단지 장면의 외형만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공간에서 느꼈던 공기, 온도, 특유의 냄새, 발밑의 질감과 울림같은 감각이 함께 떠오른다. 이러한 감각 자극은 뇌의 감정 처리 회로와 연결되어 감정 반응을 유도하고 이렇게 생성된 감정이 기억의 강도와 지속성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어떤 장소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감정이 덧 입혀진 생생한 사건의 현장이 된다.
예기치 않게 특정 장소에서 감정이 솟구치는 경험은 해마(hippocampus)와 편도체(amygdala)의 작용으로 설명된다. 해마는 공간 정보를 기억하는 뇌의 핵심 부위로, 특히 '장소 세포(place cell)'라 불리는 신경세포들이 특정 위치에 대한 기억을 저장한다. 편도체는 감정 반응을 조절하며, 해마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감정이 결합된 기억을 강화한다. 이 두 구조의 협력 덕분에 공간은 단순한 위치 정보가 아니라 감정을 품은 기억이 된다.
이러한 생리적 기전을 고려하면 공간의 설계는 보기에 좋거나 기능적인 것을 넘어서야 한다. 인간의 뇌는 감각과 감정이 함께 각인된 공간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요소를 공간에 적극적으로 담아야 하는 것이다. 색채, 조명, 재료의 촉감, 소리의 울림, 향기 등은 감정 경험을 유도하고 기억을 강화하는 핵심 요소 이다. 우리는 공간을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전체로 기억하는 것이다. 감정이 담긴 기억은 오래 남고, 기억에 남는 공간은 결국 다시 찾고 싶게 만든다. 그래서 공간을 설계할 때는 그 안에서 어떤 감각이 작동하고, 어떤 감정이 담기게 될 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느낌의 공간을 설계합니다
좋은 공간은 눈에 보이는 형태를 넘어, 우리의 감정을 움직인다. 공간의 온도, 빛, 질감에 따라 우리의 감정은 매 순간 요동친다. 이러한 감정으로 우리는 그 장소를 기억한다. 공간 설계는 감각과 정서를 구성하는 일이다. 기능과 형태는 기본값일 뿐이다. 진정한 건축의 힘은 감정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감각적 장면을 세심하게 연출하는 데 있다. 사용자의 삶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감각을 자극하며 마음을 움직이는 공간.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공간. 그것이 바로 '느낌의 공간'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공간이다.
글쓴이 | 이원호 (AaRC | 대표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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