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찾기 실험으로 알아보는 스트레스
최근 가상현실(VR)을 활용한 흥미로운 길 찾기 실험이 발표됐다. 스트레스가 인간의 예측과 선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 참가자들은 VR 환경에서 익숙해지도록 길을 학습한 뒤, “가장 빠른 경로로 목적지에 도달하라”는 과제를 받았고 이 중 일부에게 “실험 중 언제든 전기 충격이 올 수 있다”는 안내를 통해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게 했다. 그리고 참가자들이 길을 찾는 동안, 연구진은 fMRI로 뇌 활동을 추적하고 침샘에서 코르티솔(스트레스 호르몬)을 채취해 스트레스 반응을 관찰했다.

보통 길 찾기를 특별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목적지에 닿기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 그 자체가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단순한 행동 속에 매우 복잡한 뇌의 작동 원리가 숨어 있다. 우리는 길을 찾을 때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예측하고 판단한다. 막히는 길은 피하고, 더 나은 경로를 선택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과 주변 단서를 활용한다. 이런 행동은 삶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과도 닮아 있다. 그래서 경로 탐색은 의사 결정이라는 인지 과정을 들여다보기에 좋은 도구다. 뇌가 과거를 참고해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상상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따져보는 고차원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실험 결과, 스트레스를 받은 참가자는 낯선 지름길보다 익숙한 경로를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지름길 선택 비율은 스트레스 그룹이 31%, 대조군은 47%로 큰 차이를 보였다. 뒤돌거나 배회하는 행동은 두 집단 모두 비슷했지만, 스트레스 그룹은 익숙한 길을 선택한 비율이 42%로, 대조군(30%)보다 높았다. 이는 단순히 방향 감각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위험을 줄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연구진은 스트레스가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기보다는 안전한 전략을 고수하게 만든다고 해석했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뇌는 '미래 계획과 의사 결정'보다 '익숙한 행동'을 우선시한다. 유연한 판단에 필요한 인지 자원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대조군은 지름길을 더 많이 활용했고, 중간에 멈추는 횟수도 적었다. 이들은 초기 계획 단계에서 이미 효과적인 전략을 세우고 움직였다는 뜻이다.
스트레스와 뇌의 활성감도
스트레스 그룹과 대조군의 뇌는 활동 양상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특히 해마(Hippocampus)와 전두엽-두정엽 인지 통제 네트워크(CCN)의 활성도에서 큰 차이가 나타났다. fMRI 분석 결과, 스트레스 그룹은 이 두 영역의 활성도가 전반적으로 낮았다. 이런 결과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복잡한 미래 예측이나 유연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진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거나 계획을 세울 땐, 과거 경험과 축적된 기억을 꺼내는 능력이 주요하다. 과거 기억 회상에 중심이 되는 부위가 내측 측두엽(Medial Temporal Lobe, MTL)이다. 여기에 더해, 미래 상황을 상상하거나 예측할 경우,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PFC)과 두정엽 피질(parietal cortex)까지 포함하는 네트워크가 활성화 한다. 이런 모든 부위가 통합되는 인지 통제 네트워크(CCN)는 여러 기억을 비교하고 선택하는 과정을 조율하며, 복잡한 의사결정과 계획 수립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1) 해마(Hippocampus)
- 과거 경험(기억)을 재구성하고, 미래 경로를 예측하는 핵심 영역.
- 스트레스가 심할수록 활성도가 줄어들어 새로운 경로를 구상하는 능력이 저하되었습니다.
2) 전두엽-두정엽 인지 통제 네트워크(frontoparietal cognitive control network,CCN)
- 여러 기억을 비교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목표 설정과 행동 계획을 주도하는 고차원적 인지 회로.
- 스트레스가 가중되면 이 네트워크가 유연한 전략을 세우기 어려워지고, 익숙한 루틴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집니다.
실험에서는 뇌 부위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스트레스가 높을수록 기억을 떠올리거나, 기억을 기반으로 판단하는 데 관여하는 부위들의 기능이 저하되었다. 스트레스 그룹은 빠른 경로를 찾을 때든, 익숙한 경로를 고를 때든 해마의 활성도가 일관되게 낮았다. CCN의 경우, 빠른 길을 찾기 위해 탐색할 때, 스트레스 그룹은 거의 변화가 없던 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그룹은 활성도가 확실히 높아졌다. 그 외에도 스트레스 그룹의 다양한 뇌 부위에서 활성 감도 자체가 전반적으로 낮아진 것이 확인되었다.
스트레스 호르몬과 뇌 기능
코르티솔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분비되는 대표적인 호르몬으로, 기억 회상, 미래 예측, 의사 결정에 관여하는 뇌 부위의 작동을 방해할 수 있다. 특히 전두엽-두정엽 인지 통제 네트워크(CCN)의 활성화를 억제하게 되면 기억을 떠올릴 확률과 정확도 모두 떨어진다. 무언가를 기억해내는 능력 자체가 약해지는 것이다.

코르티솔은 각성 상태에서 분비되며, 스트레스 상황에서 빠르게 대응하도록 포도당을 뇌로 보내고, 교감신경계를 활성화한다. 이로 인해 심장은 빨라지고, 근육은 긴장하며, 몸 전체가 즉각 반응할 준비를 한다. 문제는 이런 신체 반응이 강해질수록 주의력과 통제력은 떨어진다. 신체는 긴장 모드에 진입했기 때문에, 익숙한 행동 패턴에 더 의존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선택보다 주로 선조체가 담당하는 습관적 기억에 기대는 경향이 커지는 것이다.
실험에서도 이런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참가자들이 실험 전 채취한 초기 코르티솔 수치는 두 그룹 모두 비슷했지만, 실험 도중에는 스트레스 그룹의 수치가 유의미하게 높아졌다. 즉, 스트레스가 실제로 뇌의 예측과 결정 능력을 저하시켰다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그 결과, 낯선 경로를 시도하기보다 익숙하고 안전한 선택으로 되돌아가려는 행동이 더 자주 나타났다.
이런 반응은 공간 탐색 뿐 아니라 일상 속 의사 결정에도 적용될 수 있다. 스트레스가 높을수록 사람은 새로운 시도 대신 자신에게 익숙한 선택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결과가 완전히 절망적인 건 아니다. 길 찾기 실험을 반복하자, 스트레스 그룹과 일반 그룹의 차이는 점점 줄어들었다.
스트레스 그룹도 지름길을 선택하는 비율이 50%까지 올라갔고, 일반 그룹(55%)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실험이 끝날 무렵엔 코르티솔 수치도 거의 같아졌다. 이건 스트레스가 일시적인 영향을 줄 순 있어도 뇌 기능을 영구적으로 억누르지는 않는다는 증거다. 즉, 익숙한 선택에 머물러도 괜찮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뇌는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스트레스는 우리를 어떻게 망칠까요?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아침에 뭘 먹을지, 무슨 옷을 입을지, 출근길에 어떤 길로 갈지 같은 소소한 결정들이다. 이런 선택은 평소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만,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하나하나가 버거워진다. 업무, 학업, 인간관계에서 받는 압박이 클수록 선택의 과정은 부담이 되고, 결국 최선의 선택을 할 확률도 점점 줄어든다.
스트레스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꾼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뇌가 바뀐다.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서는 뇌가 안전을 먼저 고려하기 때문이다. 낯선 걸 피하고, 익숙한 것만 선택하게 된다. 도전하려는 의지는 줄고, 무기력감은 점점 커진다. “그냥 이대로가 낫겠지”라는 생각이 점점 굳어지고, 더 나은 선택을 할 기회마저 스스로 막아버리는 일이 생긴다.
위험을 피하려는 건 나를 보호하는 본능이지만 그만큼 새로운 기회에서 멀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기회는 도전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되는데, 계속 안전한 동굴 안에만 머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창의성을 빼앗아가는 스트레스
사고의 유연성이 줄면 창의력도 함께 감소할 수 밖에 없다. 창의성은 ‘새로운 걸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르게 보는 태도에 더 가깝다. 이런 시선의 전환이 일상 문제를 유연하게 해결하게 해주는데,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그마저 어렵다. 창의적인 태도를 잃으면, 문제 해결 능력도 함께 무뎌진다.
길 찾기로 살펴본 미래 예측과 의사결정
길 찾기는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행동 같지만, 사실은 예측(prospection)과 의사결정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고차원적인 사고다. 우리는 경로를 선택할 때 과거 경험을 떠올리고,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미래를 그려보며 가능한 시나리오를 비교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길 찾기는 뇌가 어떤 식으로 사고하는지를 들여다보기에 딱 좋은 과제다.
이번 연구는 스트레스가 단순히 방향감각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고 결정하는 능력 자체를 제한한다는 걸 보여줬다. 결국 사람은 익숙한 루틴이나 이미 몸에 밴 행동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건 공간 탐색 뿐 아니라,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 왜 새로운 전략을 잘 찾지 못하는지를 설명한다. 앞으로 다양한 연령과 성별, 그리고 만성 스트레스 상태까지 고려한 연구가 이어지면 뇌의 유연성을 회복하고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 더 구체적인 해법이 나올 수 있다.
글쓴이 | 이원호 (AaRC | 대표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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