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을 찾는다'는 일상적인 행동 뒤에는 복잡하고 정교한 뇌의 작동 원리가 숨어 있다. 우리의 뇌는 도시부터 작은 방까지 다양한 스케일에서 공간을 탐색하며 머릿속에 지도를 그린다. 이 과정을 살펴보며 이용자 중심의 공간 디자인 이란 무엇인지 고민해 본다.
뇌가 그리는 ‘인지 지도’와 공간 탐색
우리는 매일 길을 찾는다. 출근길, 동네 산책, 여행지에서의 방향 탐색까지. 익숙한 공간에서는 고민 없이 움직이기도 하지만, 조금 낯선 곳을 가야 할 경우 스마트폰 지도는 필수다. 그런데 이 단순해 보이는 행동 뒤에는 뇌의 복잡한 작동이 숨어 있다. 길을 찾는 순간 뇌에서는 공간을 인식하고 방향을 정하며 기억을 쌓는 과정에서 ‘인지 지도(cognitive map)’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길 찾기는 단순한 ‘목적지에 도착하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이동하는 동안 마주치는 수많은 정보들이 머릿속에 구조화된다. 눈에 띄는 건물, 횡단보도, 표지판, 거리를 가득 매운 빵 냄새, 자동차 경적 소리 같은, 감각 자극들이 서로 연결되어 지도에 기록되고 있다.
뇌가 공간을 탐색하는 세 가지 전략
뇌는 ‘인지 지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공간 정보를 탐색한다. 과학자들은 이 탐색 과정이 세 가지 전략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바로 알로센트릭(Allocentric), 이고센트릭(Egocentric), 비콘(Beacon) 전략이다. 세가지 전략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 아주 작은 공간부터 도시처럼 큰 환경까지 공간의 스케일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
알로센트릭(Allocentric): 바깥 세상을 기준 삼다
‘알로센트릭’은 ‘다른 것(allo)’을 ‘중심(centric)’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내 바깥에 있는 랜드마크나 주변의 경계를 기준 삼아 지도를 그리듯 머리 속에서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처음 가보는 도시에 높이 솟은 탑이나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면, 그 건물은 내 위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저 건물을 기준으로 두 블록 떨어진 곳이 목적지”처럼 외부의 뚜렷한 대상을 기준으로 공간을 파악한다. 이 전략은 2차원 평면 위에 최소한 세 개의 좌표(나, 목적지, 랜드마크)를 설정하고, 이들 간의 거리와 방향을 계산하며 점차 더 많은 정보를 쌓아 정교한 지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1948년, 미국의 심리학자 에드워드 톨먼(Edward C. Tolman)은 미로 속 쥐 실험을 통해 이 전략을 증명했다. 쥐가 미로의 출발점에서 음식이 있는 목적지까지 냄새만 쫓는 것이 아니라, 벽의 배열이나 표시처럼 환경 요인을 기억해 정확히 목적지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쥐가 미로를 탐색할 때, 주변 환경을 이용해 ‘인지 지도(cognitive map)’를 만든 것이다.

이 개념은 존 오키프(John O’Keefe)와 린 네이들(Lynn Nadel)의 연구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두 사람이 쥐의 해마에서 특정 위치에 있을 때만 활성화되는 ‘장소 세포(place cells)’를 발견한 것이다. 이 발견은 인지 지도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뇌의 특정 부위에서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알로센트릭 전략을 잘 보여주는 연구 중 하나가 ‘상대적 방향 판단 과제(JRD, Judgement of Relative Direction)’이다. “내가 A 지점에 서서 B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면, C 지점은 어느 방향에 있을까?” 같은 문제가 제시된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주변에 위치한 다양한 표식의 위치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람들은 단순한 건물뿐 아니라 벽이나 길처럼 환경의 전체적인 기하학적 구조 역시 참고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특정 건물이 주변의 주요 축과 정렬되어 있으면, 방향을 더 정확히 잡는다는 연구도 있다. 즉, 알로센트릭 탐색은 랜드마크와 공간의 경계를 기준 삼아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판단하는 전략이다.
이고센트릭(Egocentric): 내 몸이 곧 기준
이고센트릭 전략은 ‘나(ego)’, 즉 내 몸을 기준으로 방향과 거리를 계산하는 전략이다. 내 앞에 있는 나무, 표지판, 갈림길처럼 가까운 사물의 위치를 인식해 즉각 경로를 정한다. 주변 환경 자체보다는 나의 위치와 움직임에 초점을 둔다. 그래서 1인칭 시점에서 들어오는 시각 정보가 핵심 단서가 된다.
이 전략이 가능하려면, 뇌가 몸의 방향 변화를 정확히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신경학적 장치가 머리방향세포(Head Direction Cells)이다. 이 세포는 특정 방향으로 머리가 향할 때만 활성화된다. 일종의 ‘두뇌 속 나침반’인 것이다. 어떤 세포는 머리가 동쪽을 바라볼 때 활발하게 작동하고, 또 다른 세포는 남쪽을 향할 때 반응한다. 이 덕분에 우리는 어두운 공간이나 시각적 단서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방향을 잡을 수 있다.

2000년 왕(Wang)과 스펠케(Spelke)의 실험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고센트릭 탐색은 몸의 회전 각도나 이동 방향을 비교적 정확하게 추적하는 능력에 기반한다. 여기에 머리방향세포의 ‘방향 정보’가 결합되면, 시야가 가려지거나 환경이 복잡해도 내가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경로가 복잡하거나 이동 거리가 길어지면, 이고센트릭 전략만으로 한계가 생긴다. 이럴 때는 주변 환경 정보를 함께 활용해야 한다. 결국 다른 전략과 상호 보완해야 안정적인 탐색이 가능하다.
비콘(Beacon): 눈 앞의 목표를 향해 직진
‘비콘’은 등대처럼 뚜렷한 목표물을 기준 삼아 곧장 그쪽으로 이동하는 전략이다. 간판이나 표지판처럼 눈에 잘 띄는 대상을 향해 직진하는 방식이다. 이 개념은 1982년 리처드 모리스(Richard Morris)의 ‘수중 미로 실험’에서 처음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그는 원형 수조에 물을 채우고, 그 안에 보이지 않는 플랫폼을 숨겨 놓았다. 실험 초기 쥐들은 플랫폼을 무작정 찾았지만,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주변에 놓인 뚜렷한 물체(비콘)를 단서 삼아 빠르게 플랫폼을 찾아갔다.

비콘 전략은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눈앞에 목표물이 보일 때, 빠르게 방향을 정하고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목표물이 사라지거나 환경이 복잡해지면 한계가 분명하다. 예를 들어, GPS 내비게이션을 생각해 보자. “다음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세요”라는 안내를 따라 모퉁이를 돌 수 있다. 그러나 주변 구조나 위치 관계는 파악하기 어렵다. 실제로 내비게이션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공간의 전체 맥락이나 지형지물을 기억하기 어려워진다는 연구도 있다.
결국 비콘 전략은 빠른 판단과 즉각적인 반응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하지만 공간의 구조를 이해하거나 인지 지도를 형성하는 데는 제약이 있다. 즉, 길을 ‘찾는’ 데는 유리하지만, 그 공간을 ‘이해하는’ 데는 불리하다.
방에서 도시까지: 규모에 따라 다른 인지전략
‘조망 공간(vista space)’과 ‘환경 공간(environmental space)’이라는 개념은 1993년 다니엘 몬텔로(Daniel R. Montello)가 「Scale and multiple psychologies of space」라는 논문에서 처음 제안했다. 그는 인간의 공간 정보 처리 능력을 ‘공간의 규모(scale)’라는 관점에서 다시 정의하고자 했다.
몬텔로가 분류한 공간의 범주는 네 가지다. 첫째, 신체보다 작은 ‘도형적 공간(Figural space)’. 둘째, 한 시점에서 전체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조망 공간(vista space)’. 셋째, 직접 이동하며 관찰해야 전체 모습을 알 수 있는 ‘환경 공간(environmental space)’. 마지막은 실제로 움직여서 경험하기는 어렵고, 지도나 설명을 통해 인지되는 ‘지리적 공간(geographical space)’이다.
조망 공간(Vista Space)
‘Vista’는 전망, 혹은 시야를 뜻한다. 조망 공간은 방이나 정원처럼 내 시야에서 전체 구조를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는 크기의 공간이다. 머리나 눈만 움직여도 전체 배치를 훑어볼 수 있다. 시각 정보가 선명하게 들어오며, 기억에도 잘 남는다.
환경 공간(Environmental Space)
환경 공간은 시야 밖까지 포함하는 더 넓은 공간이다. 국가나 대륙처럼 큰 규모는 아니지만, 단일 시점에서는 전체 구조를 볼 수 없다. 도심, 대형 건물, 복잡한 실내 구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공간은 여러 경로와 시점을 통합해야만 이해할 수 있으며, 그만큼 인지적·신경적 부담도 크다.
조망 공간에서는 1인칭 시점의 정보가 빠르게 들어온다. 즉, 이고센트릭 전략이 우선 작동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띄는 랜드마크들이 기억에 남고, 점차 알로센트릭 전략으로 확장된다. 반면 환경 공간은 하나의 시점에서 전체를 볼 수 없다. 여러 이고센트릭 정보들을 순차적으로 쌓고, 이동 경로에서 얻은 알로센트릭 정보들—예컨대 거리 감각이나 방향 감각—을 종합해 서서히 인지 지도를 완성해 간다.
예를 들어보자. 처음 가본 도시에서는 숙소 주변만 파악하기도 버겁지만, 며칠 지나면 지하철역, 랜드마크, 공원 등이 서로 연결되며 전체 구조가 머릿속에 잡힌다.
또 다른 예는 로봇 청소기다. 청소기는 라이다(LiDAR)와 카메라로 주변을 스캔한다. 처음엔 한 지점에서 주변 사물 위치를 파악한다. 이는 조망 공간에서 사람이 이고센트릭 정보를 빠르게 수집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하지만 로봇 청소기는 집 전체를 다녀야 하므로, 각 지점에서 얻은 정보를 모아 더 큰 환경 공간의 지도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알로센트릭 전략도 활용한다. 그리고 가구나 장애물이 바뀌면 실시간으로 지도를 갱신한다. 이는 도시에서 우리가 지하철 역이나 건물 위치를 익히며 전체 지도를 점차 그려나가는 것과 같은 원리다.
길은 바라보는 자에게 모두 풍경
조망 공간과 환경 공간의 차이는 단순히 “작은 공간 vs 큰 공간”의 문제가 아니다. 뇌가 공간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고 이해하는지, 즉 시야의 범위, 이동 경로의 통합, 시간에 따른 점진적 학습 방식 등 서로 다른 신경 작동 방식을 보여준다.
이런 신경학적 이해는 건축, 도시, 실내 디자인은 물론 가상현실(VR), 자율주행, 증강현실(AR) 같은 분야에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앞으로도 뇌의 공간 탐색에 대한 연구는 계속될 것이며, 이와 결합된 디자인과 기술은 우리 삶 속으로 더 빠르게 스며들 것이다.
길을 찾는다는 건 단순히 목적지에 도달하는 행동이 아니다. 뇌는 주변 환경을 관찰하고 기억을 정리하며, 순간적인 판단으로 복잡한 결정을 내린다.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특별한 경험이다. 익숙한 길도 새로운 시선으로 보면, 그동안 지나쳤던 작은 변화와 풍경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신경준의 『도로고』에는 “길은 이동하는 사람에게는 통로이지만, 바라보는 자에게는 풍경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길을 걷는다는 일이 뇌가 주변을 느끼고 이해하며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과정임을 알고 있던 걸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뇌는 쉼 없이 작동한다. 크고 작은 단서들을 엮어가며, 익숙한 세계 속에서 낯선 감각과 마주하게 한다. 그리고 그 작은 발견 속에서, 뇌라는 도구의 놀라움을 다시 깨닫게 된다.
글쓴이 | 이원호 (AaRC | 대표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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