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매를 돕는 주거환경’왜 필요할까?
가족 중 누군가 치매 진단을 받는 일은 당사자와 가족 모두에게 충격과 혼란을 안긴다. 치매를 처음 진단받은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혼란, 기억 저하로 인한 불안을 겪게 되며, 가족들은 앞으로의 돌봄 과정과 일상 변화에 대한 막막함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응은 함께 지내는 공간을 점검하고, 치매 증상에 따른 위험 요소를 줄이도록 개선하는 일이다. 치매 환자들은 기억력 저하뿐 아니라 길을 잃거나, 익숙한 장소를 혼동하거나, 운동 능력이 감소하면서 낙상, 화상, 사고의 위험에 노출된다.
따라서 주거환경의 작은 변화는 치매 환자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가족의 돌봄 부담을 줄이며, 모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첫걸음이 된다. 이 글은 알츠하이머 국제협회(ADI)에서 발간한 '세계 알츠하이머 리포트'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치매 환자를 위한 주거환경 개선의 원칙과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AaRC(아크)는 치매를 겪는 이들과 그 가족이 겪는 혼란과 불안, 일상의 불편함을 줄이고, 심리적 안정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 디자인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치매를 돕는 주거환경’이란 무엇인가?
치매는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뇌질환 또는 뇌혈관계 질환으로 인해 인지 기능이나 운동 능력이 저하되는 상태를 말한다. 기억력 저하, 시간과 장소에 대한 혼동, 낯익은 사람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나며, 불안, 망상, 분노 등 정서적 증상도 함께 수반될 수 있다.
운동 능력이 떨어지면 스스로 식사하거나 위생을 관리하는 일조차 어려워지고, 평범한 일상에서 크고 작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인지 저하와 운동 기능 저하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심리적 위축, 사회적 단절, 삶의 질 저하로 이어지기 쉽다.
이런 이유로 치매를 돕는 주거환경은 단순히 편리함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당사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격려하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안전하게 지원하며, 사회적 교류와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집의 구조를 바꾸는 일만으로 건강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잔존 능력을 유지하고 자존감을 지키며 안전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 주거환경 개선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가족 역시 감시와 간섭 중심의 돌봄에서 벗어나 감정적 유대와 실질적인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
‘치매를 돕는 주거환경’ 만들기의 10가지 원칙
심리학자 리처드 플레밍 교수와 건축가 커스티 베넷은 치매 환자가 안전하고 자율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 주거환경 설계를 위한 10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이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설계하세요
치매 환자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면, 무엇보다도 안전한 실내 환경이 선행되어야 한다. 난간, 손잡이, 울타리 같은 안전 설비는 필수적이지만, 시각적으로 두드러지지 않도록 벽이나 바닥과 유사한 색상이나 재질로 마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인공적인 설비는 때때로 환자에게 자신이 병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좌절감이나 불안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보호 목적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환경에 자연스럽게 통합되도록 설계해야 한다. 또한, 문턱을 제거하고 가구 간격을 넓히는 등의 단순한 공간 조정만으로도 별도의 장치를 설치하지 않고도 안전성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2. 휴먼스케일(human scale)을 반영
휴먼스케일(human scale)은 사람의 신체 치수에 맞춘 공간 설계를 의미한다. 문의 손잡이나 스위치, 가구의 높이와 폭은 사용자의 허리나 팔 길이에 맞게 조절되어야 하며, 공간의 크기나 밀도 역시 사용자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계획되어야 한다.
공간이 지나치게 넓거나 천장이 높고, 구조가 복잡하거나 사람이 많이 오가는 장소는 치매 환자에게 불필요한 긴장과 피로, 심리적 압박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은 사용자가 공간을 주도적으로 인식하기 어렵게 하기 때문에, 무기력감이나 불안을 악화시킬 수 있다. 반대로, 작은 방이나 적절한 크기의 가구 배치는 공간 전체를 한눈에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인식을 제공하여 안정감과 자율성 회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3. 쉽게 보고 이동할 수 있는 환경
치매 환자는 현재 위치를 인지하거나 다음에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 혼동하기 쉽다. 이를 최소화하려면 주요 생활 공간(예: 거실, 식당, 부엌, 침실, 야외 공간)이 서로 시각적으로 잘 연결되도록 설계해야 한다. 사용자가 가고 싶은 곳을 쉽게 보고 인지할 수 있을 때, 스스로 방향을 선택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자율성이 생긴다. 이를 시각적 접근성(visual access)이라고 하며, 탐색 의지를 높이고 활동 참여를 촉진하며, 돌봄 인력이 환자의 상태를 쉽게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4. 무익한 자극을 최소화 하기
치매 환자는 주의를 분산 시키는 자극을 걸러내는 능력이 저하되어 있다. 때문에 시끄러운 소리, 무의미한 장식, 중복된 정보가 담긴 표지판, 무질서한 배치의 가구나 잡동사니 등은 오히려 혼란과 스트레스를 증가 시킨다. 실내 공간은 단순하고 정돈되어야 하며, 불필요한 감각 자극을 최소화해 뇌의 인지 부담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5. 유익한 자극 최적화
인지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정보를 다양한 감각으로 전달하는 '중복 단서(redundant cue)' 기법이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화장실 표지판에 글자와 그림을 함께 표시하거나, 침실에서는 벽지, 조명, 침구, 가구의 색과 형태가 침실이라는 메시지를 통일성 있게 전달하도록 구성한다. 이런 설계는 공간의 기능을 보다 직관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6. 이동과 참여
치매 환자에게 자발적인 이동은 신체 기능 유지뿐만 아니라 정서 안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동 경로에는 흥미를 끌 수 있는 작은 요소들(예: 그림, 식물, 창문, 조형물)을 배치하고, 자연스럽게 소통이 일어나는 장소를 지나게 하면 참여 의지를 높일 수 있다. 또한, 실내와 실외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하며, 날씨가 좋은 날 외부 활동이 가능하도록 유도하는 동선이 포함되어야 한다.
7. 친숙한 공간
익숙한 환경은 치매 환자의 기억을 자극하고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과거에 사용하던 가구나 소품, 사진 등을 적절히 활용하면 새로운 공간에서도 친숙함을 느낄 수 있다. 공간 설계 시, 거주자의 삶의 배경과 취향을 고려하여 개인화된 구성을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기능적 자립뿐 아니라 감정적인 만족에도 기여한다.
8. 혼자 있거나 함께할 권리
치매 환자도 고립되지 않도록 하면서 동시에 사적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간 내에 다양한 규모와 성격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독서를 위한 조용한 공간, 소규모 대화를 위한 응접실, 다수를 위한 거실 등의 배치를 통해 개인의 선택권을 존중하고 활동의 다양성을 지원할 수 있다.
9. 소통 가능한 장소
사회적 교류는 치매 환자가 자신에 대한 인식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방문객이 부담 없이 들를 수 있고, 환자와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환경은 긍정적인 정서 반응을 이끌어낸다. 아늑한 분위기의 응접 공간,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테이블, 따뜻한 조명과 식물이 있는 장소 등은 사람 간의 연결을 돕는다.
10. 가치관을 담는 공간
각 치매 환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생활 방식과 가치관은 주거환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일부는 요리나 가사일을 통해 활기를 찾고, 또 다른 이들은 독서나 정원을 돌보며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이런 활동이 가능하도록 주방이나 서재, 정원 등은 단순한 기능을 넘어 개인의 삶의 의미와 연결되도록 설계해야 한다. 환자의 선호를 반영한 공간은 삶의 질을 높이고, 돌봄 제공자에게도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지원을 가능하게 한다.
‘치매를 돕는 주거환경’ 키포인트
치매를 앓는 이들이 편안하고 안정된 일상을 유지하려면,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이 반영된 공간 구성과 감각 자극의 적절한 조절이 필요하다. 이는 환자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감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며, 일상 속 혼란과 스트레스를 줄이고 보다 평온한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환경은 지나치게 복잡하지 않아야 하며, 익숙한 사물과 공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정돈되고 단순한 구성은 인지 부담을 줄이고, 자율적인 이동과 일상 참여를 촉진한다. 또한, 타인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사회적 연결성과 사적 안정이 공존하는 설계로 이어진다.
AaRC는 치매를 돕는 주거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이어가며, 환자와 가족, 그리고 돌봄 제공자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환경을 제안하려고 한다. 치매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고, 돌봄 부담을 줄이며, 건강한 상호작용이 가능한 공간은 개인을 넘어 지역사회 전체에도 큰 가치를 더한다.
글쓴이 | 이원호 (AaRC | 대표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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