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왜 공간 설계에 있어 감정과 느낌을 강조하시나요?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공간의 기억이 있습니다. 이 경험이 특별할 수도, 평범할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기억 속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장면으로 남아 있어요. 저에게는 어린 시절 옷장이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옷장은 노란 빛의 밝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문짝에는 사슴이나 소나무 같은 십장생 문양이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었어요. 안쪽 낮은 칸에는 두툼한 요와 이불이 가지런히 쌓여 있고 틈새 깊은 곳엔 오래된 필름 카메라 같은 물건이 숨겨져 있곤 했습니다. 어린 제가 들어가기에도 좁은 공간이었지만, 이불 위에 몸을 눕히고 손을 뻗어 흔들면, 나풀거리는 옷자락 사이로 나프탈렌과 엄마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묘한 안도감을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때로는 동전 같은 것을 기대하며 주머니마다 손을 넣어보고 이불 뒤에 손을 쑥 넣어 무언가를 찾는 것도 저만의 작은 놀이였죠.
이런 장면은 왜 이토록 또렷하게 남아 있을까요? 감각이 기억을 강화하는 장치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경험이 강력한 감각과 결합할 때, 그것은 단순한 장면을 넘어선 감정이 되고 이야기가 됩니다. 반대로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면, 옷장 속 순간이 저에게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요? 감정이 없는 기억은 의미 없이 반복하는 사건의 반복일 뿐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수많은 자극에 노출되지만 대부분은 금세 잊혀지고 맙니다. 그러나 감각은 단순한 신체 반응을 넘어, 정서와 감정을 유도하는 강력한 스위치로 작용합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통해 받아들인 자극은 뇌에서 해석되며 '느낌'으로 전환되고, 이 느낌이 감정으로 확장되면서 기억 속에 새겨지는 것이죠. 그렇게 새겨진 공간의 경험은 우리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고 때때로 우리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저에게 옷장이 그러했듯이요.
저는 바로 그 '느낌의 공간'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감각에서 감정으로, 감정에서 기억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을 공간 속에 담아내는 것.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방향인거죠.
2. 어떤 공간이 그토록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빛과 소리, 향기와 질감 같은 감각 정보는 뇌의 해마(hippocampus)에 모여 현재의 기억으로 통합됩니다. 해마는 장소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감정적 맥락도 함께 저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해마 바로 앞 부분에는 감정 반응을 유도하는 편도체(amygdala)라는 부위가 있는데요. 해마와 긴밀히 연결되어 우리의 느낌에 감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렇게 '감정이 있는 기억'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장소를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감정이 깃든 사건으로 떠올리게 됩니다.
이 편도체-해마 회로는 다시 기억과 감정의 신경회로가 수렴하는 시상하부로 이어집니다. 시상하부는 호르몬을 조절해 신체 반응을 유도하는 핵심 중추입니다. 이는 다시 자율 신경계와 연결되어 심장 박동, 내장, 체온 등 우리의 생리적 상태를 조절합니다. 즉, 특정 공간은 감각과 감정을 넘어 몸 전체의 반응을 이끌어낸다고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우리는 공간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전신으로 '느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특히 해마에는 '장소 세포(place cell)'와 처럼 공간 인식과 관련된 신경 세포들이 밀집해 있어, 특정 장소에 대한 기억이 감정과 결합되기 쉬운 구조를 가집니다. 그래서 어떤 장소에 들어서는 순간, 예기치 않은 감정이 불쑥 일어나거나 오래된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장소는 기억과 감정을 단단히 묶는 고리인 셈이죠.
3. ‘감각 → 느낌 → 감정’의 구조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공간 경험에서 감각은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는 첫 관문이며, 느낌’은 이러한 감각 자극을 뇌가 통합하고 해석하면서 발생하는 주관적 정서 입니다. 이 느낌은 감정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우리의 판단과 행동을 이끄는 핵심 토대가 됩니다.
인간의 의사결정은 단순한 논리적 계산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현재의 맥락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미래를 예측하려는 과정에서 감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감정이 정보를 선별하고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감정은 뇌의 전전두엽과 편도체, 해마 등, 뇌의 여러 부분들의 상호 작용을 통해 주의, 집중, 위험, 동기 부여 같은 복합적 판단 과정을 조절합니다. 이러한 시스템 덕분에 인간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직관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죠. 감정이 바로 직관의 핵심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AaRC는 어떻게 ‘느낌의 경험’을 설계하나요?
우리는 신경과학과 심리학의 최신 연구들을 참고하되, 이를 이용자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건축적인 언어로 치환하려고 노력합니다. 구체적인 감각 자극 패턴이 사람의 감정과 인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공간의 빛, 재질, 동선, 음향 같은 감각 요소로 구현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사용자의 느낌을 섬세하게 반영하는 감정 환경을 설계하는 데 있습니다.
인문적 감수성은 공간 설계에 있어 과학적인 접근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기도 하지만, 사용자의 일상에서 출발하여 공간이 품고 있는 서사를 발굴합니다. 이를 통해 공간이 단순한 기능적 배경이 아니라, 사용자의 삶과 감정에 깊이 연결되는 정서적 매개체가 되도록 유도합니다.
실제로 뇌 과학 연구에 따르면, 정서적 연관성이 높은 자극은 그렇지 않은 자극보다 장기 기억으로 남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모든 공간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감정과 기억에 어떤 느낌을 남기죠. 그래서 공간은 사용자에게 정서적 공명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맥락과 의미를 설계에 반영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느낌을 디자인합니다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선사하는 감정 기반의 건축을 추구합니다.
글쓴이 | 이원호 (AaRC | 대표 건축가)
댓글